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며 … (“내 사랑 원더우먼”) [손녀의 회상]

 (고 안소원 권사님의 손녀 딸 신지민의 할머니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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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목걸이에 선글라스, 너풀너풀한 실크 블라우스에 야무지게 여민 스카프, 그리고 바람에 휘날리는 머릿결까지. 빛바랜 필름 속이지만 언뜻 봐도 탄성이 절로 나오는 이 진정한 패셔니스타 아가씨가 오픈된 지프차에 당당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보세요. 저 당당한 자세에서 보이는 당찬 성격의 이 아가씨는 코 흘리며 우는 아기들을 보면 더럽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는 깔끔을 넘어선 까칠한 깍쟁이었을 것 같네요. 평생 연애만 하면서 살 것 같은 이 새침한 아가씨는 스물다섯 살의 꽃다운 나이에 시집을 갔고, 아들 하나에 딸 셋까지 낳은 아줌마가 된 후에도 깔끔하고 까칠했다고 하네요. 왜 뜬금없이 아가씨 얘기를 하냐구요? 이 아가씨의 첫째 딸의 외동딸이 바로 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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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할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날씬하고 똑똑하다고 생각하시는 외손녀입니다. 제 유치원 시절 기억에서 가장 생생하고 기분 좋은 것들 중 하나가 뭔지 알려드릴까요? 바로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길이에요. 유치원 버스에서 내려 언덕을 올라 벨을 누르고 할머니 댁 대문이 열리면, 잔디밭을 가로질러 집으로 이어지는 돌로 된 길의 끝에는 언제나 두 팔을 활짝 벌린 모습으로 웃고 계시는 할머니가 계셨어요. 대문이 열리자마자 저는 할머니, 하고 신나게 소리치면서 길을 따라 총총 뛰어간 후에 할머니의 품에 안기곤 했지요. 그러면 할머니는 제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할머니를 따라 신발을 벗은 다음에는 벗은 신발을 꼭 가지런히 정리해야 했어요. 벗은 신발을 정리할 때는 신발 뒷굽이 꼭 거실 쪽을 향하게 하는 것이 포인트에요. 집 안에 있던 사람이 밖으로 나갈 때 편히 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예의라는 할머니의 말씀 때문이지요.
화장실 문턱 앞의 화장실 슬리퍼까지 가지런히 정돈해놓으시는 깔끔한 우리 할머니는 홀로 작은 주택을 지키세요. 그래서 매일매일 해야 하는 집안일은 모두 할머니 혼자의 몫이에요. 하루 종일 서서 부엌일을 하시는 건 물론이고 손이 가는 모든 일은 스스로 해결하시기 때문에 많이 피곤해하실 법도 하지만, 우리 할머니는 철인이기 때문에 끄떡없어요. 할머니가 철인이라는 사실은 할머니 댁에서 잔 다음 날 아침 알 수가 있죠. 문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소리들을 따라 거실로 나가면, 할머니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깔끔하게 단장하신 모습으로 식탁 테이블 앞에 마치 백작 부인처럼 우아한 정자세로 앉아계시지요. 정말로 운이 좋아 이른 새벽에 눈이 저절로 번쩍 떠지는 날에는 거실로 나가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아요. 대신 할머니 방문을 빼꼼 열고 들여다보면 찬송 CD를 틀어놓고 책상에 앉아 성경을 읽으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게 되지요. 그러다가 할머니가 저를 보시면 “그래, 지민이 일어났니?”하시는데, “네!” 라는 답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그 목소리에는 분명히 어떤 신비한 비밀이 있을 것만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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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생이 되고나서 학교 근처로 이사를 하고, 공부한다는 핑계로 할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면목 없는 손녀가 특히나 부끄러워지는 날들이 있어요. 할머니 댁에서 돌아오신 엄마가 “할머니께서 꼭 지민이 갖다 주라고 하셨다”며 비닐봉지를 건네주시는 날들이에요. 엄마가 딱히 별 말씀을 하지 않으셔도 저는 그 비닐봉지가 할머니께서 교회에서 받아오신 간식봉지란 사실을 알지요. 봉지 속에 담긴 작은 떡이나 과자를 집어 들면 할머니의 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지며, 잠시 할머니는 요새 잘 지내고 계시나 하는 생각을 하며 부끄러운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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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무렵이었을까, 할머니 댁에 갔을 때에 거실 가구 배치가 크게 달라진 날이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할머니 댁 거실 한 쪽에는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큰 창문이 있는데, 할머니께서 아무 것도 없던 그 창가 쪽에 작은 탁자와 의자를 갖다 놓으셨더라구요. “정원이 내다보이는 곳에서 성경도 읽고 책도 읽으면 참 좋을 것 같아서” 하시면서요. 할머니가 그 때 무렵을 기점으로 서서 움직이시는 시간보다 그 작은 탁자 앞에 앉아 조용히 정원을 바라보시는 시간이 부쩍 늘었고 언제나 건강하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찾아온 신증후군으로 낮에도 침대에 누워계시는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했어요. 원더우먼에 열광하는 힘없는 소시민이 엄청난 폭탄을 맞고 맥없이 쓰러져있는 원더우먼의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보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요, 제게는 언제나 철인처럼 강하지만 더없이 따뜻하던 할머니가 누워 계시는 모습도 낯설고 마음이 아팠는데 몸이 자꾸만 부어 결국 병원에 입원하여 계신 병실 문을 처음 열자마자, 저는 너무나 야위어 있는 할머니의 모습에 숨이 턱 막혔었지요. 눈물 콧물을 다 흘리며 할머니를 꼭 껴안는 순간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이제 품에 안기는 것은 제가 아니라 할머니라는 사실을요. 그리고는 할머니께서 저를 위해 항상 그러셨던 것처럼, 이제는 품 안에 쏙 들어오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으며 아무 말 없이 기도를 올렸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할머니를 위해 손을 잡고 기도한 건 그 때가 처음인 것 같네요. 그 후 할머니는 “지민이는 점점 커지는데 할머니는 자꾸 쪼그라든다.”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웃으실 때 제 마음은 왜 이리도 짠해지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혼잣말 을 합니다. 내 사랑 원더우먼 할머니, 할머니는 쪼그라들지 않아요.
“지민아, 뭐하니?”
어, 사진에서 본 그 아가씨네요.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분명히 보이지만, 고운 미모는 여전해요. 다만 달라진 점이 한 가지가 있다면, 그 새침한 도도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점이에요.
살짝 열린 방문 틈에서는 갓 지어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 냄새가 맛깔스럽게 풍겨 와요. 문을 열고 나가자 할머니와 엄마가 식탁 앞에 앉아 저한테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하고 계시는 모습이 보이네요. 식탁 앞에 셋이 모여앉아 함께 조용히 기도를 하고 난 후, 엄마와 저는 할머니가 첫 숟가락을 드실 때까지 기다려요. 밥상 앞에 꼿꼿하게 앉아  우아한 모습으로 숟가락을 드신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아까 본 아가씨의 얼굴이 흐릿하게 겹쳐 보이네요. 저도 밥을 한 술 떠서 입에 넣는데, 왜 갑자기 눈시울이 살짝 뜨거워지는지요.
오늘도 차마 말하기엔 쑥스러워 입 안 한가득 밥을 넣고 오물거리며 속으로 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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